2026.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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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홀오브페임] 바클리 이야기 : 굿바이 필라델피아

가끔 생각해본다. NBA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던 1990년대에 기록되고 전파될 수 있는 수단이 지금처럼 많았다면 어땠을까? 즉, 선수 일거수일투족이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더 생생히 전파된다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찰스 바클리의 이미지는 단순한 '악동'으로만 남아있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한때 그의 어록만 정리된 코너가 생겼을 정도로 그는 할 말 다 하고 사는 스타일이었고, 이 때문에 잦은 구설수에 시달렸다. 코트 밖에서는 팬들과 소송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코트 위에서 바클리는 팀내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투혼과 열정은 곧 바클리의 모토이자 그를 위한 수식어였고, 누구든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응징(?)이 뒤따랐다.

이번 [홀 오브 페임] 코너에서는 팬들이 '찰스 바클리' 하면 가장 많이 기억하는 피닉스 선즈 시절, 그 직전의 이야기를 담았다. 승리가 너무 간절해 진통제를 맞고 나와서 몸을 날리던 그 모습. 남성팬들을 울컥하게 했던 그 집요함과 집념으로 가득 찼던 모습. 그 모습 뒤에는 "이러다가는 평생 우승 한 번 못 해보고 은퇴할지 모른다"라는 불안감과 좌절감이 숨어 있었다.

간절했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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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어빙으로부터 프랜차이즈 스타 자리를 물려 받은 바클리. 그는 올스타 연속 출전, 올-NBA 팀 연속 선발 등 여러 면에 있어 슈퍼스타의 길을 따라갔다. ⓒ gettyimages/멀티비츠

바클리는 1984년 NBA 드래프트 전체 5순위로 필라델피아 세븐티 식서스에 지명됐다. 식서스는 애초 마이클 조던을 선발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지명 순위가 결정된 이후에는 앞 순위에 먼저 지명될 것이라 판단해 차선책으로 오번 대학 출신의 '리바운드 하는 둥근 산(The Round Mound of Rebound)' 바클리를 선발하기로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바클리가 식서스에 합류할 때만 해도 이 팀은 제법 경쟁력이 있는 팀이었다. 1983년에 65승 17패를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1983-1984시즌에도 52승을 거두었다.

바클리의 첫 시즌이었던 1984-1985시즌에는 모지스 말론, 줄리어스 어빙, 앤드류 토니, 모리스 칙스 등 핵심 멤버들을 앞세워 58승 24패를 기록했다. 그 시즌 필라델피아는 동부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기도 했다.

미국나이로 21살 루키였던 바클리도 82경기 중 60경기를 주전으로 소화하면서 '승리의 맛'을 봤다. 당시 주전센터 모지스 말론의 존재는 바클리가 NBA에서 경쟁력을 키우는데 큰 힘이 됐다는 후문이다. (바클리는 말론을 친형처럼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영광의 주역들이 하나, 둘 팀을 떠나면서 팀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승리 대신 패배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1987-1988시즌에는 36승 46패로 플레이오프조차 진출하지 못했다. '바클리의 원맨팀'으로 불리던 시기였다. 바클리는 이미 2년차에 평균 20득점 12.8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팀 성적은 반비례 곡선을 그렸다.

당연히 바클리는 구단측에 전력 보강을 요구했다. 동료들의 분발도 촉구했다. 그는 싫은 것은 못 참는 성격이었고, 지는 것은 더더욱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한번은 경기를 무기력하게 지자 "이런 약골들(wimp)!"이라며 대놓고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 기자들도 많아 그의 코멘트는 그대로 지면에 실렸다.

그래도 바클리는 당당했다.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해서 호감을 사느니, 차라리 나 살고 싶은대로 살고 미움을 받겠다."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바른 말'이 '잔소리'로 들릴 때도 있다. 구단주 해롤드 카츠(Harold Katz)는 바클리가 껄끄러웠다. 이미 NBA에서는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선수로 성장한 바클리였기에 무시하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투자를 해야겠다는 열의도 없었던 것이다.

바클리를 다독이기(?) 위해 주장 자리를 주기도 했지만, 이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난 DR.J의 프랜차이즈 스타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 여기 이 팀에는 어느 누구도 비판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사실, 카츠 구단주는 필라델피아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부자였다. 1981년 7월에 구단을 사들일 무렵만 해도 식서스는 우승 가능성이 충분한 팀이었다. 이미 1980년에도 우승엔 실패했지만 NBA 파이널 무대를 밟아봤던 팀이었다. 그러나 막상 리빌딩 시즌에 접어들고, '투자'가 필요해지자 그는 공격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 결국 그는 1996년 4월에 구단을 매각했다. 필라델피아의 그 다음 황금기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간신히 찾아왔다.)

바클리는 그런 카츠가 못마땅했다. "구단주가 생각이 없다"고 대놓고 발언을 했으니 말다했다. 그런 바클리를 보면서 전(前) 홍보팀장이었던 데이브 코스키 씨는 진땀 꽤나 흘렸다는 후문. 당시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바클리는 현대 스포츠맨의 이미지와는 정확하게 대치되는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나이스 가이(Nice Guy)이기를 거부하는 선수"라는 것.

그렇다고 바클리가 불만만 가득했던 선수는 아니었다. 피닉스 선즈가 발행했던 소식지 'Fast Break'紙의 짐 브루워 기자는 "동료들이 100%를 하면, 바클리는 동료들을 위해 110%를 쏟을 선수"라며, "자신이 아파서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누구보다도 괴로워했던 선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바클리는 의리도 꽤 강했다. 매직 존슨이 HIV 바이러스 감염으로 은퇴하자, 매직을 기리는 마음에서 34번 대신 32번을 달고 뛰었다. 당시 32번은 식서스에서 빌리 커닝햄이 사용해 영구결번 됐던 번호였으나, 커닝햄에게 직접 양해를 구하고 1년간 사용하기도 했다. 몇몇 선수들이 매직과의 플레이를 걱정하자 적극적으로 변호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결국 'W'라는 글자 하나에 울고 웃는 선수였다. 누구보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이에 따라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바클리의 전기를 다룬 대다수 매거진, 단행본 등을 보면 그의 '가난 탈출'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말해준다.

바클리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앨라바마 리즈 지역 출신이다. 아버지는 고교졸업반 때 그를 낳고선 생활고를 못 이겨 집을 떠났다. 뉴욕 타임즈는 "인종 차별이 심했던 그 시기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들이 아이까지 키우기에는 버거웠을 것"이라고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유아기에는 빈혈이 심해서 수혈을 정기적으로 받기도 했다. 그런 바클리를 키우기 위해 할머니와 어머니는 가정부부터 청소부까지 안 했던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지극정성과는 반대로 바클리는 어릴 때부터 반항기가 심했다. "12살 때 처음으로 좀도둑질을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가 농구공을 잡은 이유는 단 하나, 출세해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언젠가는 프로선수가 되어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지가 오랫동안 그를 지탱했다.

성공에 배고팠던 남자

고교 입학 당시만 해도 바클리의 키는 170cm에 불과했다. 고2 때는 정규팀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키가 자라면서 전국에서 주목받는 유망주가 된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예비엔트리까지 오랜 끝에 탈락했지만, 오번대학 2학년 때부터는 NBA 에이전트들이 찾아오는 유망주가 되어 있었다. 한 번은 에이전트가 용돈을 주고 간 것이 적발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때도 바클리는 언더사이즈 빅맨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공식 신장은 198cm이지만, 실제 키는 193cm도 안 된다는 이야기는 이미 바클리가 선수로서 조명 받을 무렵부터 나왔던 것이었다. 뉴욕 타임즈는 "리바운드로 경기를 지배한 역대 최단신 선수"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바클리에게는 농구하는데 있어 키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주로 파워포워드와 센터로 출전했던 그는 공격 리바운드는 모조리 걷어낸 뒤, 세컨 찬스 득점을 손쉽게 올렸다. 덕분에 야투성공률도 62.6%였다. 이는 오번 대학 역대 기록이 되기도 했다.

볼 다루는 솜씨도 나쁘지 않았다. 가로채기 후 코스트-투-코스트(Coast to Coast)로 코트를 가로질러 덩크를 꽂는 장면은 바클리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했다. (오번 대학은 2001년, 바클리가 사용했던 등번호 34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바클리는 키만큼이나 체중으로도 관심을 많이 받았다. 250파운드(114kg)는 기본이고, 심할 때는 130kg까지도 측정될 때가 있었다. 필라델피아 구단이 계약서에 체중 관리 조항을 삽입했을 정도로 우려가 심했다. (※ 213cm의 하킴 올라주원이 전성기에 114~115kg 정도를 유지했으니, 20cm 가까이 작았던 바클리가 얼마나 과체중이었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식서스의 레전드, 바비 존스는 바클리가 처음 트레이닝 캠프에 왔을 때 줄리어스 어빙에게 "저 몸으로 등과 무릎이 얼마나 버틸 지 걱정되는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체중이 많이 나간 덕분에 바클리에게는 '냉장고', '리바운드하는 둥근 산'등 주로 체구에 대한 별명이 많이 붙었다. 그렇지만, 코트 위에서 그가 보여줬던 점프력과 스피드, 파워는 어마어마했다.

여기저기 체중에 대한 우려가 많았지만, 정작 바클리는 체중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대학 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스트레칭만큼은 철저하게 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기분이 안 내키면 몇 달이고 쉬곤 했었지만, 스트레칭은 간과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이는 과격한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강한 내구성을 보였던 원동력이었다. (※ 래리 버드는 "바클리는 바디 컨트롤 능력이 아주 좋다. 한번 퍼스트스텝을 내주면 그 다음에는 실점이다. 유연함에 힘까지 실려 있다"라고 평가했다.)

프로 진출 후 바클리는 죽기 살기로 뛰었다. 덕분에 그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연봉도 쏠쏠하게 챙겼다. 그는 "나는 허리와 등, 무릎을 걸고 뛰고 있다. 어쩌면 은퇴한 뒤 평생 아파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과 맞바꿀 수 있는 대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구단에 요구하기도 했다. (※ 바클리는 벌어들인 돈을 부모님과 가족을 위해 쓰면서 어린 시절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너무 많이 벌어들인 탓일까? 마이클 조던과 바클리는 NBA에서 소문난 내기골프와 도박, 스트립 클럽 광으로 악명이 높았다. 도박으로 날린 돈만 해도 어마어마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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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시절, 바클리는 경기당 2~3개 이상의 강렬한 슬램덩크를 꽂았다. 덩크 대회에 나설 정도로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 이상의 파급력이 있는 플레이였다. ⓒ gettyimages/멀티비츠

프로 초창기까지도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던 바클리는 3년차 때부터 연봉 100만 달러 대열에 가세할 수 있었다. 바클리의 연봉인상 요인은 분명했다. 그가 스타가 될 이유도 분명했다. 시즌별로 주요 활약상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 1984-1985시즌 (58승 24패)
루키 시즌. 평균 14.0득점 8.6리바운드 기록하며 올-루키 팀 선발
플레이오프에서는 14.9득점 11.1리바운드 기록

‣ 1985-1986시즌 (54승 28패)
주전으로 출전. 20.0득점과 12.8리바운드 기록. 리바운드는 팀내 1위.
소속팀은 컨퍼런스 준결승 진출, 바클리는 올-NBA 세컨드 팀에 선발

‣ 1986-1987시즌 (모지스 말론 이적/45승 37패)
14.6리바운드로 리바운드 타이틀 차지(공격 리바운드 5.7개)
NBA 올스타 첫 출전, 올-NBA 세컨드 팀에 선발(플레이오프서 24.6득점 기록)

‣ 1987-1988시즌 (줄리어스 어빙 은퇴/PO 탈락/36승 46패)
28.3득점(야투 58.7%)과 11.9리바운드 기록, NBA 올스타전 출전
올-NBA 퍼스트 팀 선발,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모델
※ 식서스 선수가 SI 표지로 나선 것은 1974-1975시즌 이후 처음

‣ 1988-1989시즌 (46승 36패)
25.8득점(야투 57.9%)과 12.5리바운드 기록, NBA 올스타전 출전
올-NBA 퍼스트 팀 선발, 플레이오프 진출(1라운드 탈락)

‣ 1989-1990시즌 (53승 29패)
시즌 MVP 투표 2위(수상자는 LA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
올-NBA 퍼스트 팀 선발, 올스타전 출전, 필라델피아는 53승
※ 플레이오프에서는 시카고 불스에 의해 준결승서 탈락

‣ 1990-1991시즌 (44승 38패)
27.6득점, 10.1리바운드 기록하며 올-NBA 팀 선정
올스타전에서는 17득점 22리바운드로 MVP 선정
※ 플레이오프에서는 시카고 불스에 의해 준결승서 탈락

‣ 1991-1992시즌(식서스에서의 마지막 시즌/PO탈락/35승 47패)
23.1득점 11.1리바운드 기록하며 올스타전 출전(올-NBA 세컨드 팀)
식서스에서의 23.3득점은 구단 역대 3위, 리바운드는 7년 연속 팀내 1위

오번 대학 시절 하이라이트
→ 링크 :
http://youtu.be/0q-J-rqy5eE

바클리 필라델피아 시절 하이라이트
→ 링크 : http://youtu.be/-1_-9NjTT6E

이처럼 좋은 기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키를 초월하는 힘과 스피드, 그리고 센스 덕분이었다. 바클리는 언젠가 "나는 포지션이 없다. 난 농구 선수일 뿐이다. 그런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선수는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클라이드 드렉슬러, 그리고 나 정도뿐이다"라고 자평하기도 했는데, 한창 운동능력이 받쳐주던 시기(스피드와 점프력으로 수비가 커버됐던 시기)의 바클리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는 생각이다.

1988년 11월 30일 포틀랜드 블레이저스 홈 경기에서는 41득점 22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당시 마이크 슐러 감독은 "NBA에서 바클리와 조던이 가장 막기 힘든 선수다. 바클리는 작은 수비수를 붙이면 높이로 제압하고, 큰 선수를 붙이면 스피드로 제압한다. 빠른 선수를 매치업 상대로 정하면 힘으로 압도한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 슐러 감독의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릭 아델만은 "게임에 대한 높은 이해도는 종종 바클리를 평가할 때 간과되는 부분이다. 그는 볼이 없을 때도 무서운 선수다. 리바운드, 풋백 등 공헌도가 높다. 아쉽게도 그에게는 파울이 잘 안 불릴 때도 있다"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왕조' 해체 뒤, 바클리는 식서스 공격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24초 공격제한 시간 중 13초는 바클리가 공을 컨트롤 했다. 혼자 포스트업, 페이스업으로 득점을 올리거나 패스를 통해 찬스를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성공률이 높은 공격이었다. 1988-1989시즌 허시 호킨스가 가세하면서 그나마 옵션이 다양해졌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바클리에 대한 의존도는 조던만큼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았다.

바클리도 자신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체중 감량에 애를 썼던 시절도 있었다. 1987-1988시즌이 대표적인데, 줄리어스 어빙이 은퇴한 뒤 본격적으로 팀의 얼굴로 올라섰던 시기였다. 이때 그는 패트릭 유잉, 찰스 오클리와의 매치업에서 장점을 십분 발휘하며 40득점 17리바운드를 작성하기도 했다.

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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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클리는 뛰어난 입담 덕분에 은퇴 후 방송해설가이자 농구전문 프로그램의 패널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친정팀에 대한 애정이 강한 편. 지난 시즌의 피닉스, 필라델피아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사진=손대범)

1991-1992시즌 중 바클리는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식서스에서는 더 희망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팀이 강해지길 바랐지만 그러지 않자 실망감도 커졌다. 이미 조던은 1991년 우승을 차지한 뒤였다. 불스의 전망은 밝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지금의 팀 전력은 나로 하여금 욕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바클리의 말이다.

그 시기 바클리는 사고도 많이 쳤다. 과속은 기본이고, 총기소지로 체포되기도 했다. 물론, 총기소지의 경우 그 당시 펜실베니아 주(州)에서는 허가증을 받은 반면에 뉴저지에서는 받지 않아 일어난 해프닝이었지만,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엔 충분한 사건이었다. 관중과 말다툼을 하고, 침을 뱉어 구설에 올랐으며, 팀 동료 마누트 볼과는 연습 중에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경기 중에 안 싸웠을 리가 없다. A.C 그린(前 LA 레이커스)에게는 팔꿈치를 날렸고, 빌 레임이버(前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는 시원한 육탄전을 벌여 연루된 모든 이들의 벌금이 16만 달러를 넘긴 일도 있었다.

선수에서 그치지 않았다. 경기를 대패한 뒤 라커룸에서 감독에게도 욕을 해서 1만 달러 벌금과 구단 자체 징계를 받는 일도 있었다. (※ 1991년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紙는 "바클리가 NBA 데뷔 후 필라델피아에서 낸 벌금은 족히 10만 달러는 넘으며, 이를 뛰어넘을 선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기사를 쓰기도 했다. 바클리는 이 기사에 대해 "1989-1990시즌에는 28개의 테크니컬 파울을 기록했지만, 올 시즌에는 12개 밖에 안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날 싫어한다. 횟수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날 묻어버릴 건수만 찾는 것 같다"라고 불평했다. 단언컨대 요즘 시대 같았으면 인터넷으로 수천 번은 재생산됐을 대박 '건수'다. 그래서인지 당시 필라델피아 팬들 중에서는 "일부러 나쁜 사람처럼 보이려는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는가 하면, "그저 천성이 나쁜 사람 같다"라는 의견을 내놓는 이도 있었다.)

1988-1989시즌에는 테크니컬 파울 신기록(30개)을 세우기도 했다. 이 기록은 라쉬드 월러스가 2001년에 41개를 기록할 때까지 역대 최다기록이었다.

코트 안팎에서 문제가 계속되는데다 감싸주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구단 욕을 해댄 바클리. 급기야 바클리가 트레이드를 요구하자, 구단도 결국 바클리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1991-1992시즌 트레이드 마감일은 1992년 2월 20일이었다. 아주 거대한 제안이 들어와 리그를 흔들었다. LA 타임즈는 "LA 레이커스가 제임스 워디와 엘든 켐블을 필라델피아로 보내고, 바클리를 영입하는 딜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필라델피아는 이 딜을 성사시킨 뒤에 바로 워디를 샬럿 호네츠로 보내고, 렉스 채프먼과 켄들 길을 받는 트레이드도 계획하고 있었다. (※ 워디는 샬럿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며 큰 거부감을 안 보였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 딜은 성사되지 않았고, 바클리도 김칫국만 마신 채 시즌을 그대로 마쳤다. 시즌 성적은 35승 47패. 데뷔 이래 가장 안 좋은 성적이었다. 프랜차이즈로 봐도 1974-1975시즌 이후 가장 승률이 저조했던 시즌이었다.

1991-1992시즌을 마친 뒤, 필라델피아는 분위기 쇄신을 위해 더그 모(Doug Moe) 감독을 영입한다. 더그 모는 덴버 너게츠에서 얼리 오펜스(Ealry Offense) 위주의 농구를 추구하던 감독이었다. 그는 필라델피아가 빠른 페이스에 볼을 더 많이 공유하는 농구를 주입할 것이라 말했다. 그런데, 이는 바클리의 스타일과는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시스템이었다.

또, 바클리 입장에서는 선수 보강 없이 시스템만 바꾼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던 모양. 계속해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구단도 계속 트레이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식서스 짐 라이넘 단장은 동부 컨퍼런스로 보내기보다는, 서부 컨퍼런스로 보내고 싶어 했다. 시스템상으로 볼 때, 동부 팀은 4번을 만나야 하고, 서부 팀은 2번만 만나면 된다. 플레이오프 파이널이 아닌 이상, 순위 결정에 있어서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레이커스, 선즈 등 협상팀들이 주로 서부 팀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 클리퍼스와의 딜도 추진됐다. 그러나 식서스가 드래프트 지명권을 고집하면서 성사되지 않았다. 식서스도 바클리의 가치를 더 키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클리가 고대하던 일이 일어난다. 피닉스 선즈와 트레이드가 합의된 것이다.

1992년 6월 18일. 짐 라이넘 단장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의 제안"이라 했고, 선즈의 코튼 피츠먼즈 단장은 "다음 레벨로 가기 위한 결정이다. 최고의 카드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뉴욕 타임즈는 "피닉스 태양이 빛나는 날"이라는 문구를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과연 어떤 트레이드일까? 필라델피아는 당시 29살이던 바클리를 피닉스 선즈로 보내고, 제프 호너섹(당시 29세)과 팀 페리(27세), 앤드류 랭(25세)을 영입했다. 세 선수 모두 가능성과 장점이 확실했던 선수들이었다. 라이넘 단장은 "모 감독이 추구하던 스타일에 딱 맞는 선수들"이라며 트레이드를 반겼다.

사실, 필라델피아는 포인트가드 케빈 존슨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피닉스 이적 후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하던 케빈 존슨을 순순히 내줄 리가 없었다. 조율 끝에 호너섹과 다른 2명이 가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발표가 난 뒤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선즈 팬들은 환호했지만, 식서스 팬들은 맹비난했다.

바클리가 여름 내로 떠날 것이라고는 다들 예감했다. 그들은 "과연 바클리를 내준 대가를 충분히 받았는가?"를 두고 비난했다. (뉴욕 타임즈는 '위험한 도박'이라고 평가했다.)

트레이드 보도가 났을 때, 바클리는 밀워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재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상대방 코뼈를 부러뜨던 것이다. 바클리는 소식을 듣고난 뒤, "피닉스도 나쁘지 않은 장소"라며 비행기 탑승객들에게 모두 음료를 돌렸다는 후문이다.

다음은 트레이드 후 주요 관계자들의 코멘트다.

‣ 더그 모(식서스 감독) : 이 트레이드로 찰스가 자신에게 맞는 팀으로 갔으면 좋겠다. 이번(감독 취임 후)에 만난 찰스는 내가 알던 그 찰스가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도 더 젊어졌다.

‣ 해롤드 카츠(식서스 구단주) : 조직력은 더 좋아질 것 같다. 지난 시즌에 우리는 서로 어울리고 헌신하지 못했다.

‣ 짐 라이넘(식서스 단장) : 난 바클리 팬이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되어 무척 슬펐다.

‣ 찰스 바클리 : 기분이 묘하다. 필라델피아 팬들과는 즐거운 시간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날 안 좋아하셨던 분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든 잘 먹고 살아가겠지.

피닉스의 태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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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이 되어가면서까지 얻었던 NBA 정상 정복의 기회. 시카고 불스를 맞아 팔꿈치에 진통제까지 맞아가며 고군분투 했지만, 그는 우승까진 도달하지 못했다. ⓒ gettyimages/멀티비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의 피닉스 선즈는 젊고 가능성이 있는 팀이었지만, 동시에 무척 얌전한 팀이기도 했다.

1988-1989시즌부터 2년 연속 서부 결승에도 오르고, 매 시즌 50승 이상을 챙겼지만, 우승 후보라는 강한 인상을 남기는 데는 실패했다.

바클리가 올 무렵의 피닉스는 팀내 주도권이 탐 체임버스에서 존슨과 댄 말리 쪽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유망주들이 한참 기량이 만개해 꽃을 피울 시기였던 것이다. 그 시기 NBA 평균 나이가 27.2세였는데, 선즈는 이보다 조금 못 미치는 27.0세로 11번째로 어린 팀이었다.

그래서일까. 바클리는 합류 후 연습 중에 고의로 거친 플레이를 해서 분위기를 망쳤다고 한다. 케빈 존슨을 넘어뜨리고, 세드릭 세발로스를 자극했다. 투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선수들이 바클리의 의도를 알아채고 잘 따라갔기에 선즈는 이내 전력이 급상승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자유계약선수로 영입한 대니 에인지도 '동료로선 OK이지만, 적으로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투쟁심이 강한 스타일이었다.

두 선수가 자극제가 된 선즈는 62승 20패로 NBA 전체 승률 1위에 등극한다. 바클리도 25.6득점 12.2리바운드 5.1어시스트(커리어하이)를 기록하면서 정규시즌 MVP에 등극하기도 했다. 입담은 여전했지만, 필라델피아에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불평불만이 사라졌다. (적어도 그 시즌 동안에는) 구설수에 오를 만한 사고도 치지 않았다.

선즈는 그 해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1라운드서 LA 레이커스를 맞아 탈락 위기도 맞고, 이후에 만난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시애틀 슈퍼소닉스도 생각 이상으로 벅찬 상대였지만, 끝내 최종 무대에 도달하게 된다.

상대는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조던, 그리고 시카고 불스였다. 진통제까지 맞아가며 버텼던 바클리는 4차전에서 32득점 12리바운드 10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을 작성하는 등 생애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끝내 존 팩슨에게 마지막 3점슛을 허용하면서 우승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다. (※ 그 해 NBC가 중계했던 파이널 시리즈 시청률은 1998년 NBA 파이널 이전까지 역대 최고 시청률로 남아있으며, 지금도 역대 2위로 기록되어 있다.)

바클리는 인생의 전환점이 됐던 1992-1993시즌을 이렇게 정리했다.

"보통 때라면 훌륭한 시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속상하고 실망스럽다. 시카고 불스보다 우리가 강팀은 아닐지 몰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팀이라 생각한다. 팬들은 내일이면 현실로 돌아가지만, 우리는 지금이 현실이다. 다음 경기까지는 계속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봤을 때, 끝내 '무관의 제왕'으로 남긴 했지만 바클리에 1993년 오프시즌은 새로운 도전을 향한 준비기간과도 같았다. <계속…>

1993년 서부 준결승 7차전 위닝샷 장면
→ 링크 :
http://youtu.be/WfPcES4ivlE

1993년 NBA 파이널 6차전 하이라이트
→ 링크 :
http://youtu.be/HsX7Pj2qzSg

글_손대범(점프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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